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앤드루 커닝엄 (문단 편집) ==== [[해군참모총장|제1해군경]] ==== 1943년 10월, [[더들리 파운드]] 경의 사망으로 제1해군경이자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. 이 승진은 그가 지중해 함대 사령관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, 동명이인인 존 H. D. 커닝엄 제독[*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완벽한 타인이다. 우연히 성이 같았을 뿐. ]을 후임자로 추천했다. 커닝엄은 제1해군경의 지위와 참모장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남은 전쟁 기간 동안 해군의 전반적인 전략적 방향을 책임졌다. 그는 [[카이로 회담|카이로]], [[테헤란 회담|테헤란]], [[얄타 회담|얄타]], [[포츠담 회담|포츠담]]에서 열린 주요 회의에 참석했고, 이때 연합군은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과 영국 함대의 태평양 배치 등의 미래 전략을 논의했다. 앤트워프 항구는 [[노르망디 상륙작전|D-Day]] 이후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했지만, 커닝엄 제독과 램지는 [[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]]와 [[버나드 로 몽고메리|몽고메리]]에게 독일군이 근교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항구가 무용지물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. 그러나 몽고메리는 셸드 강 하구 전투를 연기했고, 이 때문에 항구의 개방이 지연되자, 연합군은 [[마켓 가든 작전]]이 망한 후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재정비를 하는 데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